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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2011-02-22 10:08

1) 선사시대

1927년 중국의 베이징시 외곽 저우커우톈[周口店]에서 제4기 홍적세(洪積世)의 중기 제2간빙기(第二間氷期) 지층에서 직립 유원인 다음의 고인골(古人骨)이 발견되어 북경인(北京人:Sinanthropus Pekinesis)이라는 학명이 붙여졌다.그 후 마지막 제4빙하기에 현대 아시아인종의 조상인 상동인(上洞人)이 저우커우톈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최고(最古)의 채색토기 문화가 나오는데, 이는 흑·백·홍으로 문양(文樣)을 그린 토기로 화베이 일대에서 남쪽으로는 푸젠·타이완에 분포하는데 1921년 허난성 양사오유적[仰韶遺蹟]에서 출토되어 이 계통의 문화를 앙사오문화라고 총칭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흑색토기(黑色土器) 문화의 대표적 유적은 산둥성 룽산전[龍山鎭]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룽산문화라고 한다.

2) 고대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황(三皇)·5제(五帝)의 평화 시대를 거쳐 하(夏)·은(殷)·주(周)의 3대(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은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은나라는 웨이수이[渭水]에서 일어난 주(周)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郡縣制度)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豪族) 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黃巾)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3) 중세

황건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의 국토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魏)와 유비(劉備)가 청두[成都]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중·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등의 3나라로 삼국정립 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南京]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한 6조(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호16국(五胡十六國)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鮮卑族)이 439년 북위(北魏)로 통일하여 송(宋)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형세는 581년 북조의 수(隋)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科擧)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의 미를 강조하는 당대의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 국가에 파급되어 동아문화권(東亞文化圈)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 개국이 흥망하였다.

4) 근대

당나라 말에서 5대에 걸친 비약적 산업발전 상황에서 송(宋)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송나라의 국책 기조는 재정(財政)에 두었으며 국내 경제를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완성하였다.당말(唐末) 5대에 걸치는 혼란 속에 귀족계급은 몰락하고 균전제(均田制) 아래에서 발전해온 형세호(形勢戶)라는 신흥 지주층 세력이 신장하였다. 송(宋)나라가 절도사를 폐지하자 그들이 장원(莊園)의 영주가 되고 경작은 전호(佃戶)라는 농노가 주로 하였다.

송대의 문화적 특색은 국수적(國粹的)·내성적·서민적인 점에 있고, 그 기반은 지주·관료들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으로는 넓은 지역에 요(遼)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번창하였다(916∼1125). 또 서부에서는 티베트계[西藏系]의 서하(西夏)나라가 일어나 송(宋)나라는 두 나라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12세기에는 만주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하여 요(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함락시켜, 송(宋)나라는 강남(江南)으로 도망하여 항저우[杭州]에 임시 수도로 정하였으므로 이를 남송(南宋)이라 칭한다(1127).

13세기 초에는 몽골 민족에 의해 원(元)나라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일본에 원정하는 등 여러 지역을 경략하였다. 그러나 원왕조(1216∼1368)는 인구와 문화수준의 열세 때문에 명태조(明太祖)에 쫓겨 북방으로 추방되었다. 명나라는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적 전제국가(專制國家)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국내재정의 곤란과 환관(宦官)의 발호, 기강의 퇴폐 등 문제가 산적한 명왕조가 내란으로 자멸하자, 만주 여진족의 청(淸)이 북경에 들어와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5) 최근세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문화가 명나라 말기, 청(淸)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侵占)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안남(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공업이 일기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南京事件]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중국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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